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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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는 1544년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가 설립한 대학교로, 루터교 신학을 기반으로 설립되어 프로테스탄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지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17세기에는 러시아 차르 표트르 1세가 방문하는 등 러시아와 교류했으며, 임마누엘 칸트를 비롯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교수로 재직하며 '쾨니히스베르크 세기'를 이끌었다. 19세기에는 수학 학파가 발전했으며, 20세기 초까지 명성을 이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쾨니히스베르크가 파괴되면서 대학도 큰 피해를 입었고, 종전 후에는 칼리닌그라드 국립대학교로 개편되었다. 저명한 동문 및 교수진으로는 칸트, 헤르더, 힐베르트 등이 있으며, 현재는 임마누엘 칸트 발트 연방 대학교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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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 [대학]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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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
원어 명칭 | 알베르투스-우니베르지테트 쾨니히스베르크 (Albertus-Universität Königsberg) |
라틴어 명칭 | 우니베르시타스 알베르티나 (Universitas Albertina) 아카데미아 레기오몬타나 (Academia Regiomonta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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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쾨니히스베르크 |
국가 | 프로이센 |
좌표 | 54°42′50″N 20°30′36″E |
개교 및 폐교 | |
개교 | 1544년 |
폐교 | 1945년 |
설립 정보 | |
설립자 | 알브레히트, 프로이센 공작 (1544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 폴란드 국왕 (1560년) |
유형 | 공립 |
캠퍼스 | 도시형 |
조직 | |
총장 | 게오르크 사비누스, 1544년–1547년 (초대) |
제휴 | 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
웹사이트 | 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
2. 역사
1525년 튜턴 기사단 총장이자 최초의 프로이센 공국 공작이 된 알브레히트는 프레겔강 크나이포프 섬의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뒤편 부지를 삼란트[10] 회의(capitulumla, chapter영어)[11]로부터 구입하여 1542년에 학술 김나지움을 건립하였다. 그는 1544년 7월 20일에 알베르티나 대학교(Collegium Albertinum) 설립 증서를 발행했으며, 그 후 대학은 8월 17일에 개교했다.
새로 설립된 개신교 공국은 폴란드 왕국의 영지였으며 대학은 가톨릭 교회의 크라코프 아카데미에 대응하는 루터교 교파의 대학 역할을 했다. 초대 총장은 필리프 멜란히톤의 사위인 시인 게오르그 사비누스였다. 리투아니아 학자 스타니슬로바스 라팔리오니스와 아브라오마스 쿨비에티스는 대학의 초대 교수들 중 한 명이었다.[12] 모든 교수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선서를 해야 했다. 프로이센 영토가 신성 로마 제국 국경 너머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 카를 5세와 교황 바오로 3세는 모두 승인을 보류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쾨니히스베르크 아카데미는 1560년 3월 28일 폴란드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로부터 왕실 특권을 받았다.
1618년부터 프로이센 공국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에 의해 동군연합으로 통치되었고, 1657년에는 "위대한 선제후"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벨라우 조약에 의해 폴란드로부터 프로이센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획득했다. 알베르티나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오데르) 다음으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자 프로테스탄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지적 중심지였다. 처음에는 신학, 의학, 철학, 법학의 4개 대학으로 구성되었는데 나중에 자연과학이 추가되었다. 이후 총장(rector)에는 대학에 가본 적이 없는 다수의 호엔촐레른가의 프러시아 왕족(마지막으로 빌헬름 황태자 1908-1918년)이 포함되었는데, 일반적으로 학술 업무를 담당하는 수석총장(prorector)이 그 대표를 맡았다.
프로이센 땅은 30년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은 학생들 사이에서 점점 더 인기를 얻게 되었다. 17세기에 이곳은 1656/57년에 총장을 맡은 시몬 다흐와 그의 동료 시인들의 집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1세가 1697년에 알베르티나를 방문하여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접촉이 증가했다. 많은 수의 러시아 관리들이 중상주의 이론과 행정 실무를 위하여 대학을 방문하였고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가 형성되었다.[13]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주목할 만한 러시아 학생들로는 후에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회장인 키릴 라즈모프스키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밀로라도비치 장군이 있었다. 이 도시와 대학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리투아니아어로 된 최초의 책이 1547년 이곳에서 인쇄되었으며 몇몇의 중요한 리투아니아 작가들이 '알베르티나'에 참석했다. 이 대학은 발트 독일인 귀족들이 선호하는 교육 기관이기도 했다.
18세기는 문화사에서 계몽주의의 "쾨니히스베르크 세기"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전성기는 알베르티나의 학생인 요한 크리스토프 고트셰트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철학자인 요한 게오르크 하만과 작가 테오도르 고트리프 폰 히펠 엘더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주목할 만한 동문으로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차하리아스 베르너,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 E. T. A. 호프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1786년과 1788년 총장이었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있다. 이들은 후기 바이마르 고전주의와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다.
'알베르티나'의 아름다운 식물원은 나폴레옹 전쟁 중인 1811년에 개장하였다. 2년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베셀은 정원 옆에 우수한 천문대를 건립하였다. 그 외의 교수로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1806 – 07), 생물학자 칼 에른스트 폰 베어 (1817 – 34), 수학자 칼 구스타프 야코비 (1829 – 42), 광물학자 프란츠 에른스트 노이만 (1828 – 76) 및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 (1849 – 55)와 같은 과학계의 거인들이 있다.
1844년 8월 31일, 대학교 300주년 기념식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알베르티나의 새로운 본관 건설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 건물은 1862년 프레드리히 왕세자와 요한 칼 프리드리히 로젠크란츠 총독에 의해 개관되었다. 중앙 파라데플라츠에 있는 건물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스튈러가 설계한 계획에 따라 네오르네상스 스타일로 세워졌다. 정면은 프로이센의 알베르트를 기리기 위해 기마상으로 장식되었다. 그 아래에는 개신교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와 필리프 멜란히톤의 동상이 있는 벽감이 있었다. 내부에는 대리석 기둥으로 지탱되는 멋진 계단이 있었다. 상원 홀에는 라우헤르트에 의한 프리드리히 3세의 초상화와 섀도의 학생인 하게만에 의한 이마누엘 칸트의 흉상이 포함되어 있다. 인접한 홀("Aula")은 1870년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대학 도서관은 1901년 미텔트라카임에 건립되었으며 230,000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드리테 플리스슈트라세에는 1898년에 학생과 시민들 사이에서 더 높은 형태의 스포츠를 장려하기 위해 설립된 팔레스트라 알베르티나가 있었다. 근처에는 휴고 크노어와 막스 슈미트의 벽화로 장식된 관청이 있었다. 1900년에 이 대학의 학생 수는 900명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이 대학은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에 의해 설립된 수학 학파로 가장 유명했으며 그의 제자인 루트비히 오토 헤세, 프리드리히 리헤로트, 요한 G. 로젠하인 및 필리프 루트비히 폰 자이델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는 그 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스승인 헤르만 민코프스키, 아돌프 후르비츠,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 및 가장 위대한 현대 수학자 중 한 명인 다비트 힐베르트의 이름과 연관되었다. 수학자 알프레트 클렙슈와 카를 고트프리트 노이만 (둘 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루트비히 오토 헤세 밑에서 교육을 받았음)은 1868년 '수학 연보'를 창간했는데 금방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수학 저널이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동프로이센의 영토가 분리된 이후, 알베르티나의 교수진과 독일 학생 연합은 독일 민족주의를 향한 지적 생활을 추진하며 독일 제국과의 제휴를 강조했다. 1944년 7월 10일, 이 대학은 발터 풍크 제국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400주년을 기념했다. 몇 주 후, 8월 26/27일과 29/30일 밤에 쾨니히스베르크는 영국 공군의 폭격을 받았다. 1945년 1월부터 4월까지 이 도시는 소련 적군의 동프로이센 공세와 쾨니히스베르크 전투로 더욱 황폐해졌다. 4월 9일, 오토 라쉬 장군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을 때 역사적인 도심은 공격으로 파괴되었고 대학 캠퍼스의 80%가 폐허로 변했다. 교수진은 쫓겨났는데, 그들 중 다수는 괴팅겐 대학교로 이직하였다.
알베르티나 본관을 포함하는 잔존 건물은 1948년부터 칼리닌그라드 국립 사범학교에서 사용하였으며, 1967년에는 칼리닌그라드 국립대학교로 되었다.
2. 1. 설립과 초기 발전 (16세기 ~ 17세기)
1525년 튜턴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이자 최초의 프로이센 공작이었던 알베르트는 프레겔강의 크나이포프(Kneiphof) 섬의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뒤편 부지를 삼란트(Samland) 회의(capitulum|카피툴룸la)로부터 구입하여 1542년에 학술 김나지움을 건립하였다.[10] 그는 1544년 7월 20일에 알베르티나 대학교(Collegium Albertinum)의 설립 증서를 발행했으며, 그 후 대학은 8월 17일에 개교했다.새로 설립된 개신교 공국은 폴란드 왕국의 영지였으며 대학은 가톨릭 교회의 크라코프 아카데미에 대응하는 루터교 교파의 대학 역할을 했다. 초대 총장은 필리프 멜란히톤의 사위인 시인 게오르그 사비누스(Georg Sabinus)였다. 리투아니아 학자 스타니슬로바스 라팔리오니스(Stanislovas Rapalionis)와 아브라오마스 쿨비에티스(Abraomas Kulvietis)는 대학의 초대 교수들 중 한 명이었다.[12] 모든 교수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선서를 해야 했다. 프로이센의 영토가 신성 로마 제국의 국경 너머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 카를 5세와 교황 바오로 3세는 모두 승인을 보류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쾨니히스베르크 아카데미는 1560년 3월 28일 폴란드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왕실 특권을 받았다.
1618년부터 프로이센 공국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에 의해 동군연합으로 통치되었고 1657년에는 "위대한 선제후"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벨라우 조약에 의해 폴란드로부터 프로이센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획득했다. 알베르티나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오데르) 다음으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자 프로테스탄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지적 중심지였다. 처음에는 신학, 의학, 철학 및 법학의 4개 대학으로 구성되었는데 나중에 자연 과학이 추가되었다. 이후 총장(rector)에는 대학에 가본 적이 없는 다수의 호엔촐레른가의 프러시아 왕족(마지막으로 빌헬름 황태자 1908-1918년)이 포함되었는데, 일반적으로 학술 업무를 담당하는 수석총장(prorector)이 그 대표를 맡았다.
프로이센 땅은 비참한 30년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은 학생들 사이에서 점점 더 인기를 얻게 되었다. 17세기에 이곳은 1656/57년에 총장을 맡은 시몬 다흐(Simon Dach)와 그의 동료 시인들의 집으로 알려졌다.
2. 2. 계몽주의와 학문의 발전 (18세기 ~ 19세기 초)
1525년 이래로 튜턴 기사단 총장이자 최초의 프로이센 공국 공작이었던 알브레히트는 프레겔강의 크나이포프 섬의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뒤편 부지를 삼란트[10] 회의(capitulumla, chapter영어)[11]로부터 구입하여 1542년에 학술 김나지움을 건립하였다. 그는 1544년 7월 20일에 알베르티나 대학교(Collegium Albertinum)의 설립 증서를 발행했으며, 그 후 대학은 8월 17일에 개교했다.새로 설립된 개신교 공국은 폴란드 왕관령의 영지였으며 대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크라코프 아카데미에 대응하는 루터교회 교파의 대학 역할을 했다. 초대 총장은 필리프 멜란히톤의 사위인 시인 게오르그 사비누스였다. 리투아니아 학자 스타니슬로바스 라팔리오니스와 아브라오마스 쿨비에티스는 대학의 초대 교수들 중 한 명이었다.[12] 모든 교수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선서를 해야 했다. 프로이센의 영토가 신성 로마 제국의 국경 너머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 카를 5세와 교황 바오로 3세는 모두 승인을 보류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쾨니히스베르크 아카데미는 1560년 3월 28일 폴란드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로부터 왕실 특권을 받았다.
1618년부터 프로이센 공국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에 의해 동군연합으로 통치되었고 1657년에는 "위대한 선제후"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벨라우 조약에 의해 폴란드로부터 프로이센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획득했다. 알베르티나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오데르) 다음으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자 프로테스탄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지적 중심지였다. 처음에는 신학, 의학, 철학 및 법학의 4개 대학으로 구성되었는데 나중에 자연과학이 추가되었다. 이후 총장(rector)에는 대학에 가본적이 없는 다수의 호엔촐레른가의 프러시아 왕족(마지막으로 빌헬름 황태자 1908-1918년)이 포함되었는데, 일반적으로 학술 업무를 담당하는 수석총장(prorector)이 그 대표를 맡았다.
프로이센 땅은 비참한 30년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은 학생들 사이에서 점점 더 인기를 얻게 되었다. 17세기에 이곳은 1656/57년에 총장을 맡은 시몬 다흐와 그의 동료 시인들의 집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1세가 1697년에 알베르티나를 방문하여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접촉이 증가했다. 많은 수의 러시아 관리들이 중상주의 이론과 행정 실무를 위하여 대학을 방문하였고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가 형성되었다.[13]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주목할만한 러시아 학생들로는 후에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회장인 키릴 라즈모프스키 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밀로라도비치 장군이 있었다. 이 도시와 대학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리투아니아어로 된 최초의 책이 1547년 이곳에서 인쇄되었으며 몇몇의 중요한 리투아니아 작가들이 '알베르티나'에 참석했다. 이 대학은 발트 독일인 귀족들이 선호하는 교육 기관이기도 했다.
18세기는 문화사에서 계몽주의의 "쾨니히스베르크 세기"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전성기는 알베르티나의 학생인 요한 크리스토프 고트셰트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철학자인 요한 게오르크 하만과 작가 테오도르 고트리프 폰 히펠 엘더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주목할만한 동문으로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차하리아스 베르너,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 E. T. A. 호프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1786년과 1788년 총장이었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있다. 이들은 후기 바이마르 고전주의와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다.
'알베르티나'의 아름다운 식물원은 나폴레옹 전쟁 중인 1811년에 개장하였다. 2년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베셀은 정원 옆에 우수한 천문대를 건립하였다. 그외의 교수로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1806 – 07), 생물학자 칼 에른스트 폰 베어 (1817 – 34), 수학자 칼 구스타프 야코비 (1829 – 42), 광물학자 프란츠 에른스트 노이만 (1828 – 76) 및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 (1849 – 55)와 같은 과학계의 거인들이 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이 대학은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에 의해 설립된 수학 학파로 가장 유명했으며 그의 제자인 루트비히 오토 헤세, 프리드리히 리헤로트, 요한 G. 로젠하인 및 필리프 루트비히 폰 자이델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는 그 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스승인 헤르만 민코프스키, 아돌프 후르비츠,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 및 가장 위대한 현대 수학자 중 한 명인 다비트 힐베르트의 이름과 연관되었다. 수학자 알프레트 클렙슈와 카를 고트프리트 노이만 (둘 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루트비히 오토 헤세 밑에서 교육을 받았음)은 1868년 '수학 연보'(Mathematische Annalen)를 창간했는데 금방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수학 저널이 되었다.
2. 3. 수학, 과학의 발전과 독일 제국 시기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19세기와 20세기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는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가 설립하고 그의 제자인 루트비히 오토 헤세, 프리드리히 리헤로트, 요한 G. 로젠하인, 필리프 루트비히 폰 자이델이 계승한 수학 학파로 가장 유명했다.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스승인 헤르만 민코프스키, 아돌프 후르비츠,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 그리고 현대 수학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인 다비트 힐베르트의 이름과도 연관되었다. 수학자 알프레트 클렙슈와 카를 고트프리트 노이만(둘 다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으로 루트비히 오토 헤세에게서 교육받음)은 1868년에 《수학 연보》를 창립했는데, 이 잡지는 곧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수학 저널이 되었다.[9]2. 4. 제2차 세계 대전과 종말 (20세기 중반)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동프로이센의 영토가 분리된 이후, 알베르티나의 교수진과 독일 학생 연합은 독일 민족주의를 향한 지적 생활을 추진하며 독일 제국과의 제휴를 강조했다. 1944년 7월 10일, 이 대학은 발터 풍크 제국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400주년을 기념했다. 몇 주 후, 8월 26/27일과 29/30일 밤에 쾨니히스베르크는 영국 공군의 폭격을 받았다. 1945년 1월부터 4월까지 이 도시는 소련 적군의 동프로이센 공세와 쾨니히스베르크 전투로 더욱 황폐해졌다. 4월 9일, 오토 라쉬 장군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을 때 역사적인 도심은 공격으로 파괴되었고 대학 캠퍼스의 80%가 폐허로 변했다. 교수진은 쫓겨났는데, 그들 중 다수는 괴팅겐 대학교로 이직하였다.알베르티나 본관을 포함하는 잔존 건물은 1948년부터 칼리닌그라드 국립 사범학교(Kaliningrad State Pedagogical Institute)에서 사용하였으며, 1967년에는 칼리닌그라드 국립대학교(Kaliningrad State University)로 되었다.
3. 주요 학문 분야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는 초기에는 신학, 의학, 철학, 법학의 네 개 학부로 구성되었으며, 나중에는 자연과학 분야도 포함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카를 구스타프 야코비가 설립한 수학 학파와 더불어, 프란츠 에른스트 노이만, 헤르만 폰 헬름홀츠 등이 과학 분야 교수로 재직했다.[2]
3. 1. 철학
18세기는 계몽주의에서 "쾨니히스베르크의 세기"로 문화사에 이름을 남겼다. 알베르투스 대학교 학생이었던 요한 크리스토프 갓셰트 시대에 전성기가 시작되었고, 철학자 요한 게오르크 하르만과 작가 테오도르 고틀리프 폰 히펠 등이 뒤를 이었다. 저명한 졸업생으로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차하리아스 붸르너,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 E.T.A. 호프만 등이 있으며, 특히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1786년과 1788년에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8] 이들은 후대의 바이마르 고전주의와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교수진에는 1806년부터 1807년까지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가 있었다.
3. 2. 수학
19세기와 20세기에 이 대학교는 카를 구스타프 야코비가 설립하고 그의 제자 루트비히 오토 헤세, 프리드리히 리켈로트, 요한 G. 로젠하인, 필립 루트비히 폰 자이델이 계승한 수학 학파로 가장 유명했다. 나중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스승인 헤르만 민코프스키, 아돌프 후르비츠,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 그리고 현대 수학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인 다비트 힐베르트의 이름과도 관련이 있었다. 알프레드 클레브슈와 카를 고트프리트 노이만(둘 다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으로 루트비히 오토 헤세 밑에서 교육받음)은 1868년에 《수학 연보》를 창립했는데, 이 잡지는 곧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수학 저널이 되었다.[2]3. 3. 물리학
19세기와 20세기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는 카를 구스타프 야코비가 설립하고 그의 제자 루트비히 오토 헤세, 프리드리히 리켈로트, 요한 G. 로젠하인, 필립 루트비히 폰 자이델이 계승한 수학 학파로 유명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스승인 헤르만 민코프스키, 아돌프 후르비츠,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 그리고 다비트 힐베르트도 이 대학교와 관련이 있다. 알프레드 클레브슈와 카를 고트프리트 노이만(둘 다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으로 루트비히 오토 헤세에게 가르침을 받음)은 1868년에 《수학 연보》를 창립했는데, 이 학술지는 곧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수학 저널이 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진에는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806~07), 생물학자 카를 에른스트 폰 베어(1817~34), 수학자 카를 구스타프 야코비(1829~42), 광물학자 프란츠 에른스트 노이만(1828~76),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1849~55) 등 과학계의 거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쾨니히스베르크 천문대는 181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베셀에 의해 설립되었다.
3. 4. 기타 학문 분야
18세기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는 계몽주의(Aufklärung) 시대를 맞아 "쾨니히스베르크의 세기"로 불리며 문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요한 크리스토프 갓셰트를 시작으로 철학자 요한 게오르크 하르만, 작가 테오도르 고틀리프 폰 히펠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한다. 특히, 저명한 졸업생인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차하리아스 붸르너,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 E.T.A. 호프만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훗날 바이마르 고전주의와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칸트는 1786년과 1788년에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8]1811년에는 웅장한 식물원이 개원했고, 2년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베셀은 식물원 옆에 천문대를 설립했다.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806~1807), 생물학자 카를 에른스트 폰 베어(1817~1834), 수학자 카를 구스타프 야코비(1829~1842), 광물학자 프란츠 에른스트 노이만(1828~1876),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1849~1855) 등 저명한 학자들이 교수진으로 활동했다.[8]
19세기와 20세기에는 수학 연구소가 특히 명성을 떨쳤다. 카를 구스타프 야코비, 루트비히 오토 헤세, 프리드리히 리셰로, 요한 게오르크 로젠하인, 루트비히 자이델 등이 그 명맥을 이었다. 이후 헤르만 민코프스키(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스승), 아돌프 훌비츠,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 다비트 힐베르트 등이 수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다. 알프레트 크렙슈와 카를 고트프리트 노이만은 1868년 「마테마티셰 아날렌」을 창간하여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수학 학술지로 만들었다.[8]
4. 저명한 동문 및 교수진
다음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알베르티나)의 저명한 동문 및 교수진 목록이다.
- 아브라오마스 쿨비에티스
- 아돌프 후르비츠
- 아돌프 에두아르트 그루베
- 아놀드 조머펠트
-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
- 크리스티안 골드바흐 (1690-1764), 수학자
- 다니엘 클라인
- 다니엘 로렌츠 살테니우스 (1701-1750), 신학자[14]
- 다비트 힐베르트
- E. T. A. 호프만
- 에밀 요한 비히에르트
- 에발트 크리스티안 폰 클라이스트
-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차하리아스 베르너
- 프리드리히 빌헬름 베셀
- 가보르 세괴
- 고트힐프 하인리히 루트비히 하겐
- 구스타프 키르히호프
- 헤르만 폰 헬름홀츠
- 헤르만 민코프스키
- 휴고 블뤼머 (1844-1919), 고전 고고학자이자 언어학자
- 이마누엘 칸트
- 얀 코하노프스키
-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 카를 에른스트 폰 배어
- 칼 루돌프 크니히
- 크리스티조나스 도넬라이티스 (1714-1780), 루터교 목사이자 시인
- 마르티나스 마주비다스
- 모세 노보메이스키
- 루돌프 고트샬
- 루트 무팡
- 솔로몬 숀펠트 (랍비)
- 테오도르 칼루차
- 테오필루스 시그프리드 바이어


5. 결론 및 유산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는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변화와 발전을 겪었으며,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544년 프로이센 공작 알베르트가 설립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알베르티나)는 폴란드 왕국의 봉토였던 프로테스탄트 공국의 지적 중심지였다. 루터교 신학을 바탕으로 가톨릭교회의 크라쿠프 아카데미에 대응하는 역할을 수행했다.[2] 초기에는 신학, 의학, 철학, 법학의 4개 학부로 시작하여 점차 자연과학 분야까지 확장했다.
17세기에는 30년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으며, 지몬 다흐와 같은 저명한 인물들이 활동했다. 또한,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1세를 비롯한 많은 러시아 학생들이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하며 양국 간 교류가 활발해졌다.[3] 이는 러시아 정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세기에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쾨니히스베르크 세기"라 불리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마누엘 칸트를 비롯한 저명한 학자들이 바이마르 고전주의와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수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수학 연보를 창간하여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동프로이센 주가 제국에서 분리되면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는 독일 민족주의 성향을 강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 공군의 폭격과 소련군의 공격으로 인해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고 교수진이 흩어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 이후 쾨니히스베르크는 소련의 칼리닌그라드주에 편입되었고,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는 칼리닌그라드 주립 사범대학(KSPI)으로 재개되었다.[4] 이후 칼리닌그라드 주립 대학교를 거쳐 2005년 이마누엘 칸트 발트 연방 대학교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마누엘 칸트 발트 연방 대학교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5][6]
참조
[1]
웹사이트
Search
https://archive.org/[...]
[2]
서적
The Peoples of the Grand Duchy of Lithuania
2002
[3]
서적
The Germans and the East
Purdue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University
https://www.kantiana[...]
[5]
웹사이트
Baltic Federal University
https://old.bigenc.r[...]
[6]
웹사이트
Immanuel Kant Baltic Federal University
https://www.informio[...]
[7]
서적
The Bloomsbury dictionary of eighteenth-century German philosophers
Bloomsbury Publishing
2016
[8]
서적
The peoples of the Grand Duchy of Lithuania
2002
[9]
간행물
Jahrbuch
[10]
문서
Samland는 쾨니히스베르크 지역의 교구 이름이다.
[11]
문서
capitulum은 로마 가톨릭교에서 사제들의 모임을 일컫는 용어로 한국 천주교에서는 '회의'로 번역한다.
[12]
서적
The Peoples of the Grand Duchy of Lithuania
2002
[13]
서적
The Germans and the East
Purdue University Press
[14]
서적
The Bloomsbury dictionary of eighteenth-century German philosophers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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